영성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5) 아우구스티노 (하)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입력일 2010-10-21 수정일 2010-10-21 발행일 1999-10-17 제 217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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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이론적 토대 제공
“지혜에 대해 고찰한 ‘신국론’”
“활동생활 보다 관상생활 우선”
은총의 주도권 강조, “인간의 자유 고려 미흡”평
‘공동생활·청빈·독신’ 사제서품 조건으로 제시
3. 아우구스티노의 영성

아우구스티노는 애덕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로 완성되며 교회와 밀접히 연결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관한 신학과 가츠림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그의 은총론, 관상생활과 활동생활, 「사도적 생활」의 수도영성 그리고 수덕관을 살펴본다.

3-1 의화와 구원 무상적 은총과 인간의 책임있는 협력

아우구스티노는 이설을 펴던 펠라지오학파와 호교론적 입장에서 논쟁을 하며 은총론을 정립한다. 펠라지오의 사상의 기본원리는 인간 자유의 자율성이며, 구원에 있어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며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자유가 소멸된다. 인간은 원죄와 그 결과 영향을 결코 받지 않으므로 근본적으로 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을 충분한 무죄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다. 은총은 영혼 안의 거룩한 삶의 원리도 아니고 인간의 능력에 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외적인 무엇일 뿐이다.

그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응답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그분과의 인격적 친교를 통해 친밀한 결합을 이루기 위해 창조하셨으며 초자연적 은총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첫 인간인 아담은 자유 의지로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으며 전(全) 인류의 조상 및 머리로서 죄를 지었기에 모든 인간은 그의 죄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상속받게 되었다. 원죄 때문에 인류는 타락의 집단이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하느님과의 선을 끊임없이 동경하지만 서을 성취할 자유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의화와 구원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의화의 첫 조건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지만, 그 신앙은 하느님의 「선재(先在)하는 은총」없이 불가능하다. 이설을 거슬러 이같이 은총의 절대적 주도권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자유를 적절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에 의하면 의화는 인간의 죄사함 뿐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면서 성화되어 하느님의 모상을 닮도록 한다. 그는 은총의 무상성(武償性)과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책임을 옹호하면서 영성생활에 요청되는 두 가지 중요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는 겸손, 믿음 및 기도의 실천을 통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애덕을 통해 은총에 응답하는 것이다. 애덕은 윤리생활 전체의 요약이고 그리스도교 완덕의 정수이다.

3-2 관상과 활동생활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에서 지혜의 활동적인 면과 관상적인 면을 논한다. 활동적 부분은 덕 닦는 일에 속하며 관상적 부분은 진리의 고찰과 관련된다. 활동생활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에서 수행되다가 끝나고 관상생활은 영원히 하느님을 관상하게 될 끝없는 후세의 삶에 연장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신·구약성서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활 형태의 상징적 예로 든다. 한 예를 들면, 베드로 사도는 활동생활의 대표로, 요한 사도는 관상생활의 상징적 인물로 묘사한다(요한복음 논고 124,5 참조).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양쪽을 다 체험한 아우구스티노는 삶에 다양한 길이 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세 형태의 생활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관상적 생활 또는 진리 탐구의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사에 이바지하는 생활이며 세번째는 위의 두 생활을 조화시킨 형태라는 것이다. 이 세 형태 중 어느 것이 최종 목적 달성에 용이한 것인지 각자가 선택해야 한다. 한편 다른 어느 측면을 소홀히 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신국론 19,19 참조).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여 대접하던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의 자세를 활동생활과 관상생활에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서슴치 않고 완덕 진보에 있어 관상생활을 우위에 둔다(설교집 169,179 참조).

3-3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 「사도적 생활」의 영성

아우구스티노가 구상하고 실천을 시도하던 공동체적 수도생활은 그의 생애의 네 단계 환경 변화 과정에 따라 변형되면서 발전하였다. 그는 386년 10월부터 약 8개월간 간카시치아쿰에 있는 한 친구의 별장에서 소수의 친구들 및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면서 성찰 및 묵상생활을 하였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한 그 반(半)은둔생활은 수도생활로 묘사될 수 없으나 그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

2년 후 그는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어느정도 윤곽잡힌 수도원 성격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391년 사제 서품 후 그는 본연의 모습으로서 첫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종들」이라 불렸고 재산을 공유하였다. 그는 주교가 되면서 자신의 거처를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구성원들이 공동생활하고 개인 재산 소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그의 교구사제 서품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그가 교구사제들이 공동생활, 청빈 및 독신생활을 실천하기를 주장한 이유는 사제들이 상호협력할 수 있다는 이점뿐 아니라 더 나은 기도와 연구 및 반성하는데 적합한 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생활에서 관상적 측면이 사목적 봉사 때문에 조정되면서 점차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동체에서 실천되던 사항들은 공동체적 및 개인적 기도, 침묵, 절제, 겸손, 순명, 순결, 청빈의 실천 등 전통적인 동방의 수도생활의 것과 많이 유사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덧붙여 형제적 사랑이 강조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수도원 제도의 구성원은 동방이 원래 의미의 「수도승(修道僧 : monk)이 아니라 뒷날 중세 서방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의미의 「수도자」(religious)라 할 수 있다. 동방의 수도생활이 영성지도자의 도움을 받으며 성숙시켜야 할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 즉 수직관계를 철저히 강조했던 데 비해, 아우구스티노의 수도생활은 공동체성의 가치에도 높은 관심을 기울이며 형제적 상호간의 관계 즉 수평관계를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3-5 수덕 : 엄격한 금욕주의

아우구스티노는 근본적으로 엄격주의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비판을 받는다. 그는 당시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퇴폐해 있었고 또한 자신이 젊은 시절에 향락적 생활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있었음을 절감했기에, 개종을 하면서 그러한 악습으로부터 해방되고 유혹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금욕자세를 취하고자 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개종이 마니교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졌을지라도 그의 영성에 마니교적 색조가 나타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체 대립의 이원론이 그것이다. 바로 거기에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영성이 나온다. 예를 들면 육신의 이끌림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몰아내든지 하는 것이다. 한편 수도생활에 대한 관념은 그러한 영성에 더욱 자극을 주었다. 단호한 희생만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유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개종의 과정에서 만났고 도움을 받은 신 플라톤 사상이그 안에 스며들어 영성적인 발견과 이해를 통한 감각적인 것의 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그의 금욕주의는 애덕의 발전과 사목적 관심에 의해 어느 정도 조절되기도 했으나 신비적 영감에 의하여 여전히 자극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노는 개종하면서 금욕적인 생활 외에 다른 어떤 형태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금욕을 실천한 어떠한 형태의 생활도(따라서 기존의 수도생활의 형태고) 따르려하지 않았다. 결국엔 그가 새로운 형채로 변형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수도생활이란 형태를 통해서 그것을 수행하게 된다.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